소심한 큰아들이 늘 마음에 걸렸던 규는, 없는 살림 속에서도 아이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공부만큼은 뒤처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동네에서 여선생이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본동의 허름한 집으로 아이를 보내기로 했다. 그곳은 책상 몇 개와 칠판 하나가 전부인, 지금으로 치면 과외라기보다 동네 공부방에 가까운 곳이었다. 하지만 큰아들은 그곳을 공부하러 간다는 생각이 없었다. 매일같이 왔다 갔다 하며 친구들을 만나고, 수업이 끝나면 골목에서 뛰어노는 것이 전부였다. 공부는 놀이의 한 부분일 뿐, 머릿속에 오래 남는 것은 아니었다. 규는 답답했지만, 아이를 다그칠 수도 없었다. 그 시절 국민학교 아이들의 하루는 공부보다 놀이가 먼저였고, 먹을 것이 생기면 그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이제 동생도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둘째는 아버지를 닮아 총명했다. 말수가 적고 눈빛이 또렷했으며, 반에서 늘 1~2등을 다퉜다. 형과는 성격도, 외모도, 공부도 너무 달랐다. 규는 두 아이를 바라보며 같은 배에서 나왔지만 전혀 다른 길로 자라고 있음을 느꼈다. 큰아들은 먹는 것에는 유난히 복이 있었다. 주인집에서 담가둔 콩장을 그렇게 좋아해 하루에 한 병을 거의 다 먹어치우기도 했고, 서울우유는 하루 한 병이 기본이었다. 번데기를 종이컵에 담아 손으로 집어먹으며 골목을 쏘다녔고, 어느 날은 엄마를 따라 본동 시장에 가 마늘쫑다리를 반나절 바닥에 쪼그려 앉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배만 부르면 세상 근심은 없는 아이였다. 노는 것을 너무 좋아한 탓에 하루가 성할 날이 없었다. 장난감 트럭을 밀며 달려가다 보도블록에 바퀴가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쳤다. 피가 한바가지처럼 쏟아졌고, 급히 동네 병원으로 달려가 마취도 없이 머리를 꿰매야 했다. 아이는 울었고, 규는 이를 악물고 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그 흉터가 채 아물기도 전에, 1년쯤 지나 또 사고가 났다. 바깥에서 뛰어놀다 목이 말라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다 미끄러져, 아이 키만 한 시멘트 바닥에 다시 머리를 부딪쳤다. 또다시 꿰맨 자리, 또 하나의 흉터. 그렇게 큰아들은 몸에 상처를 달고 자라났다. 공부에는 둔하고, 생각은 단순했지만, 아이는 잘 먹고 잘 뛰며 자라났다. 규는 그 아이의 흉터를 볼 때마다 걱정과 안도를 함께 느꼈다. 세상은 거칠었고, 70년대 서울의 골목은 아이들에게 안전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아이는 자기 방식대로 살아남고 있었다. 공부로 자라는 아이도 있었고, 상처로 자라는 아이도 있었다. 규는 그저 두 아이가 각자의 길에서 무너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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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강릉 사천면의 지주 집안 둘째 딸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생존을 건너 배움과 선택을 빼앗긴 시대를 견디며 마침내 인공지능의 새벽을 바라보는 노년까지— 한 여인의 조용한 생존이 곧 한국 현대사의 연대기가 되는 이야기
그날은 유난히 아이의 발소리가 가벼웠다. 큰아들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신발도 벗기 전에 말부터 꺼냈다. “엄마, 내일 학교에 식물 씨앗을 하나 가져오래요.” 그 말은 짧았지만, 규의 가슴 한쪽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집안에는 콩도 없고, 팥은 더더욱 없었다. 한때는 한 줌의 곡식이 집안의 사정을 말해주던 시절이었지만, 지금은 그 한 줌조차 없다는 사실이 새삼 선명해졌다. 규는 말없이 마당으로 나갔다. 집 한쪽에 심어두었던 옥수수 싹이 봄볕을 받으며 여리게 자라고 있었다. 흙을 파내는 손끝이 이상하리만큼 무거웠다. 뿌리째 뽑힌 작은 싹은 씨앗 대신 아이의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저녁, 큰아들은 말이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울음을 삼키듯 말했다. “엄마, 왜 제가 씨앗 가져온다고 말했는지 모르겠어요.” 그 눈빛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혼란이 섞여 있었다. 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아이는 점점 조용해졌고, 손을 드는 법을 잊어갔다. 자신감은 말처럼 쉽게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규는 그때 처음 알았다. 막내아들은 달랐다. 말수는 적었지만, 연필을 쥐는 시간이 길어졌다. 종이 위에는 언제나 여자아이의 얼굴이 그려졌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얼굴들. 이유를 묻지 않아도 아이는 그 안에서 스스로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라기 시작했다. 어떤 아이는 말없이 작아졌고, 어떤 아이는 조용히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알았다. 가난은 배고픔으로 끝나지 않고, 아이들 마음속 어딘가에 오래 남아 자리를 잡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날 파냈던 옥수수 싹은, 끝내 다시 심지 못한 채 규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날도 아이는 어김없이 약수터산으로 향했다. 책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낡은 운동화를 구겨 신고는, 엄마의 부름에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을 내달렸다. 아이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산 정상 부근에 있는 비밀 아지트와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동네 형들 생각뿐이었다. 산길은 아이에게 익숙한 놀이터였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비탈길을 오르고, 삐죽삐죽 튀어나온 소나무 뿌리를 밟으며 뛰어다녔다. 중간쯤에 있는 약수터에는 늘 물을 길으러 온 동네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로 북적였다. 아이는 그 틈새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더 높은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른들의 “조심해라!”, “뛰지 마라!” 하는 잔소리는 아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 아지트에 도착하니 과연 형들이 먼저 와서 돌멩이를 던지며 놀고 있었다. 아이는 신이 나서 합류했고,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줄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뭇가지로 칼싸움을 하고, 누가 더 멀리 돌을 던지나 시합을 했다. 아이의 무릎은 또다시 까지고 옷에는 금세 흙과 풀물이 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 보니 산 아래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했다. 저녁놀이 붉게 물들자 그제야 허기가 졌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임을 직감했다. 아이는 형들에게 내일 다시 만나자고 소리치고는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집에 도착했을 때, 마당에는 이미 저녁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나는 또 흙투성이가 된 아이를 보고 한숨부터 쉬었다. “너는 하루라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니? 그놈의 산이 그렇게 좋으냐?” 나는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아이는 그저 해맑게 웃으며 밥상 앞에 앉았다. 오늘 산에서 있었던 신나는 일들을 두서없이 늘어놓는 아이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까진 무릎에 빨간 약을 발라주며 생각했다. 공부에는 관심이 없어도, 저렇게 세상을 온몸으로 배우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다만 그 배움의 과정이 너무 거칠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날 밤, 아이는 곤히 잠들었고, 나는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약수터산만큼 넓은 세상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가기를 기도했다.
큰아들은 그렇게 명석한 아이는 아니었다. 책을 펴놓고 앉아 있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고, 문제를 빨리 이해하는 쪽도 아니었다. 대신 그 아이는 하루 종일 뛰어놀 힘만큼은 누구보다 넘쳤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밖에 나갈 궁리부터 했고, 해가 질 때쯤에야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집으로 돌아왔다. 동생을 챙기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집에 동생이 울고 있든 말든, 그의 관심은 오로지 동네 친구들과 형들에게 가 있었다. 조금만 한눈을 팔면 아이는 이미 골목을 빠져나가 있었고,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한참 뒤에야 알 수 있었다. 그 아이의 하루 일과는 늘 비슷했다. 책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약수터산으로 향하는 것, 그것이 하루의 중요한 일정이었다. 약수터산은 아이들에게 놀이터이자 비밀기지 같은 곳이었다. 물을 길어 올리는 어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형들과 함께 나무를 타고 돌을 던지며 시간을 보냈다. 집에 돌아오면 무릎은 늘 까져 있었고, 옷은 성할 날이 없었다. 나는 매일같이 잔소리를 했지만, 아이는 그때마다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웃기만 했다. 그 시절 국민학교는 아이들로 넘쳐났다. 한 반에 학생이 너무 많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는 2부제를 해야 할 정도였다. 학교는 그야말로 아이들로 가득 찬 공간이었고, 선생님들 역시 모든 아이의 학업을 세심하게 챙기기에는 벅차 보였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눈에 띄었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그 흐름 속에 묻혀갔다. 나는 가끔 학교를 찾았다. 선생님을 만나 아이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요즘 말로 하면 ‘치맛바람’이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욕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아들이 남들보다 똘똘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엄마로서 그냥 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조금 더 신경 써주실 수는 없는지, 집에서는 무엇을 도와주면 좋은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앞에 앉아 그런 말을 꺼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아이가 뒤처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고, 동시에 뭐라도 하지 않으면 더 미안해질 것 같았다. 그 아이는 공부보다는 몸으로 세상을 배우는 아이였고,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 한켠으로는 남들만큼은 따라가길 바랐다. 약수터산을 오르내리며 하루를 보내던 큰아들은 그렇게 자라고 있었다. 공부에는 둔했지만, 세상과 부딪히는 데는 겁이 없던 아이. 엄마의 치맛바람은, 그 아이를 남보다 앞서게 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뒤처질까 봐 붙잡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몸부림이었다. 그 시절 나는 그렇게, 아이의 등을 떠밀기도 하고 붙잡기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 무렵 우리 집은, 평범한 박봉의 공무원을 가장으로 둔 가난한 가정이었다. 남편의 월급 봉투는 늘 얇았고, 월말이 다가올수록 그 무게는 더 가벼워졌다. 그래도 공무원이라는 이름 하나로, 사람들은 그를 “안정된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 안정은 장부 위에만 존재했고, 우리의 삶은 늘 빠듯한 계산 위에 놓여 있었다. 아침은 연탄불을 피우는 일로 시작됐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나는 먼저 일어나 연탄을 갈았다. 연탄 집게로 까만 연탄을 옮기며 떨어지는 가루를 털어내고, 성냥불을 붙일 때면 늘 숨을 죽였다. 불이 잘 붙지 않으면 하루가 괜히 더 길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연탄 위에 얹은 양은솥에서 밥이 끓기 시작하면, 그제야 집 안에 미약한 온기가 퍼졌다. 그 불 하나로 밥을 하고, 물을 데우고, 방까지 데웠다. 반찬은 늘 단출했다. 콩자반 한 종지와 김치가 상 위에 올라오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가끔 멸치라도 있으면 아이들은 잔칫날처럼 반겼다. 나는 아이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밥을 퍼주었지만, 속으로는 늘 다음 끼니를 계산하고 있었다. 밥을 조금 더 퍼줄까, 아니면 저녁을 위해 남겨둘까. 그런 고민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었다. 아이들은 그런 사정을 잘 몰랐다. 큰아들은 밥을 먹자마자 밖으로 뛰어나가 골목을 자기 놀이터 삼았고, 작은아이는 연탄 난로 옆에 앉아 종이를 펴놓고 그림을 그렸다. 연탄불에서 올라오는 냄새와 연필심 냄새가 섞인 방 안에서, 아이는 말없이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방은 좁았고, 천장은 낮았지만, 아이들의 하루는 그 안에서도 자라나고 있었다. 밤이 되면 단칸방은 더욱 비좁아졌다. 낮에는 밥상 놓던 자리에 이불을 펴고, 모두가 한 방향으로 누워 잠을 청했다. 연탄불이 꺼질까 몇 번이고 확인한 뒤에야 불을 줄이고, 창문 틈새를 막았다. 숨이 막힐 듯 답답했지만, 추위보다 무서운 것은 없었다. 아이들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오면, 그제야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남편은 그런 집으로 밤늦게 돌아왔다. 공무원 생활에 적응해 가며 바깥에서는 점점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다시 가장이 되었다. 말수는 많지 않았고, 서로 하루의 고단함을 길게 나누지도 못했다. 그저 같은 방, 같은 이불 속에서 각자의 피로를 내려놓을 뿐이었다. 가난은 소리 없이 집 안에 스며들어 있었지만, 그 속에서 우리의 일상은 이어졌다. 연탄불 위의 밥처럼, 쉽게 넘치지도 타지도 않게 조심하며 살아가던 날들. 그 단칸방 안에서, 우리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디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버티고 있었다.
1972년 봄, 큰아들은 교복도 없이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요즘처럼 새 옷에 반듯한 교복을 입는 시대가 아니어서, 그냥 집에 있던 옷 중에서 그나마 멀쩡한 걸 골라 입혔다. 바지는 한 번 접어 꿰매고, 셔츠는 형광등 아래에서 보면 색이 조금 바랜 것이 보였다. 그래도 아이는 그 옷이 불편했다기보다, 학교에 간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입학 전날 밤부터 큰아들은 이상하게 말수가 줄었다. 평소 같으면 밖에 나가 놀자고 보챘을 텐데, 그날은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기만 했다. 나는 괜히 물었다. “학교 가기 싫어?” 아이 는 대답 대신 고개를 이불 속으로 더 깊이 파묻었다. 그 모습이 마치 세상에서 제일 큰 일을 앞둔 사람 같았다. 아침이 되자, 문제는 더 분명해졌다. 책가방을 메우려 하자 아이는 마치 무거운 짐이라도 진 것처럼 몸을 뒤로 뺐다. “나는 집에 있을래.” 그 말은 단호했다. 학교가 뭔지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면서, 본능적으로 ‘자유가 줄어드는 곳’이라는 걸 알아챈 듯했다. 밖에서 뛰어놀던 아이에게, 책상 앞에 앉아 있으라는 건 형벌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나는 달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며 아이를 현관까지 끌고 나갔다. 이웃집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 학교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큰아들은 발걸음을 질질 끌었다. 한 걸음 나아가면 두 번쯤 뒤를 돌아봤고, 골목 끝에 다다를 즈음에는 거의 끌려가는 꼴이 되었다. 학교 앞에 도착하자 아이는 마지막 저항을 했다. 내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모습이, 마치 전쟁터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비장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아이의 손을 떼어내고 말했다. “다들 가는 데야. 너만 가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아이는 한숨을 쉬듯 어깨를 툭 떨어뜨리고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혼자 웃음이 났다. 그렇게 싫어하던 학교였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큰아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교복은 없었고, 가방은 낡았지만, 아이는 또래들 속에서 금세 적응해 갔다. 국민학교 입학은 아이에게는 작은 인생의 시작이었고,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책임이 더해진 날이었다. 그날의 질질 끌리던 발걸음은, 훗날 생각해보면 웃음 섞인 기억으로 남았다. 자유를 좋아하던 아이가 세상과 처음 타협하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1964년 큰아들이 태어난 뒤, 서울은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도시는 마치 숨을 가쁘게 몰아쉬듯 변해갔다. 시청 앞은 정비 공사가 끊이지 않았고, 광화문 일대에는 허물어진 자리 위로 새로운 건물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길은 넓어졌고, 전차 소리 대신 자동차 경적 소리가 잦아졌다. 공사장 먼지 속에서 사람들은 ‘발전’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라디오에서는 연일 경제 개발과 국가 계획을 이야기했다. 서울은 더 이상 전쟁의 잔해만을 안고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고, 가난은 여전했지만 정체된 가난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나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골목마다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나 규의 하루는 여전히 단칸방 안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를 안고 밥을 짓고, 연탄을 아끼며 하루를 계산했다. 시골에 맡긴 두 딸은 늘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다. 큰딸은 이제 국민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었고, 둘째딸과 함께 전원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아침이면 할아버지와 함께 마당을 쓸고, 할머니를 도와 물을 길으며 살았다. 도시와는 다른 시간, 다른 속도 속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규는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아팠다. 아이들이 도시의 가난을 모르고 자라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엄마의 부재는 늘 마음에 걸렸다. 1966년, 규는 또다시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곧 불안으로 바뀌었다. 아이는 건강하지 못했다. 울음소리는 약했고, 숨은 가늘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고, 규 역시 마음속으로 이미 한 번 아이를 떠나보냈다. 그날 밤, 규는 아이를 따뜻한 방바닥 아래에 두었다.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살아 있을지, 이미 숨이 멎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방 안은 고요했고, 규는 잠들지 못한 채 아이의 숨을 기다렸다. 그 하루는 길었고, 끝이 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아이는 살아남았다. 다음 날, 희미하지만 분명한 숨이 이어지고 있었다. 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다만 아이를 다시 품에 안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식구는 하나 더 늘었다.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한 아이였다. 그 무렵, 남편의 삶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오랜 공무원 생활 끝에, 그는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눈에 띄게 앞서 나서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맡은 일을 성실히 해냈고, 주변의 신뢰를 조금씩 쌓아갔다. 승진 이야기가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그의 이름은 조직 안에서 안정적인 사람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공무원으로서 입지를 다져갈수록, 집안의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졌다. 여전히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내일을 계획할 수 있을 만큼은 되었다. 규는 그 변화를 말없이 받아들였다. 삶은 늘 그녀보다 한 발 늦게 나아졌고, 그녀는 그 속도를 탓하지 않았다. 서울은 계속해서 변해갔다. 광화문 주변은 점점 정돈되었고, 시청 앞 광장은 국가 행사의 무대가 되었다. 도시의 중심은 커지고 단단해졌지만, 규의 삶은 여전히 아이의 체온과 밥 냄새, 그리고 시골에 있는 두 딸의 얼굴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알았다. 이 모든 변화가 하루아침에 자신을 구해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아이들이 살아 있고, 남편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시골의 두 딸이 계절을 건너 자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은 계속될 이유가 충분했다. 그렇게 규는 서울의 발전과 함께, 자신만의 시간을 천천히 지나고 있었다. 도시는 위로 자라고 있었고, 그녀의 삶은 아래에서 단단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생활이 하루하루 겹쳐 지나가던 끝에, 1964년, 마침내 큰아들이 태어났다. 그날만큼은 규의 친정에서도 깊은 한숨이 먼저 흘러나왔고, 곧이어 참았던 기쁨이 터져 나왔다. 딸만 둘 낳았다는 마음의 짐이, 그제야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장남의 집안에 장손이 태어났으니, 그것은 한 집의 기쁨을 넘어 집안 전체의 경사였다. 말로는 요란하지 않았지만, 어른들의 얼굴에는 오랜 세월 눌러왔던 걱정이 조금씩 풀려 있었다. 규는 아이를 품에 안고서야 알았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긴장한 채 살아왔는지를. 이 아이 하나로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쁨과 함께 또 다른 책임으로 다가왔다. 남편은 여전히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월급은 정해져 있었고, 생활은 늘 빠듯했다. 쌀값과 연탄값은 자주 올랐고, 아이가 하나 늘자 계산은 더 촘촘해졌다. 부족한 돈과 아이들 간식은 때때로 미군부대에서 가져오곤 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통조림, 설탕, 초콜릿, 분유는 그 시절 단칸방 살림에서 귀한 물건이었다. 아이에게 과자를 하나 쥐여 줄 수 있는 날이면, 규는 잠시 세상이 덜 각박해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1960년대 중반의 서울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시청 앞은 정비 공사가 이어졌고, 광화문 일대에도 개발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허물어지는 건물과 새로 세워지는 구조물들이 뒤섞여, 도시는 늘 어수선했다. 길은 넓어졌고, 사람들은 바빠졌다. 공사장 먼지 속에서 ‘경제 개발’이라는 말이 현실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는 연일 성장과 계획을 이야기했다. 몇 개년 계획이니, 수출이니, 근대화니 하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규는 그 말들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거리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분주했고, 가난은 여전했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곳곳에서 보였다. 그러나 그 변화는 언제나 규의 생활보다 한 발짝 앞에 있었다. 단칸방은 여전히 단칸방이었고, 부엌은 여전히 좁았다. 시골에 맡긴 두 딸의 얼굴이 문득문득 떠올랐고, 그럴 때마다 규는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지금 이 아이만은 곁에서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1964년 무렵부터 라디오에서는 베트남 이야기가 자주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먼 나라의 분쟁처럼 들렸다. 그러나 1965년, 한국이 베트남전에 파병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쟁은 다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군복 입은 청년들이 눈에 띄게 늘었고, 누군가는 돈을 벌 기회라 했으며, 누군가는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라 수군거렸다. 규는 전쟁이라는 말에 익숙했다. 이미 한 번의 전쟁을 겪었고, 그 잔해 위에서 지금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베트남 전쟁 소식은 그녀에게 남의 일처럼만 느껴지지 않았다. 전쟁은 늘 사람들의 삶을 조용히 바꾸어 놓았고, 그 대가는 언제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치러졌다. 큰아들을 얻은 기쁨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팽팽했다. 아이의 울음은 희망이었고, 동시에 책임이었다. 시청 앞의 도로가 넓어지고, 광화문에 새 건물이 올라가도, 규의 하루는 여전히 밥을 짓고, 기저귀를 빨고, 연탄을 계산하는 일로 채워졌다. 국가는 성장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고, 도시는 빠르게 변해갔다. 그러나 규의 삶은 언제나 한 걸음 뒤에서 그 변화를 따라가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단 하나, 그녀의 품 안에 장손이라는 이름의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가 그녀를 다시 내일로 밀어주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렇게 규는 또 하나의 시대를 건너고 있었다. 전쟁의 기억 위에서, 다른 나라의 전쟁 소식을 들으며, 개발이라는 말이 현실이 되어가는 서울 한복판에서—아이를 안고 묵묵히, 그러나 단단하게.
1958년, 큰딸이 태어났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잠시 집안에 생기를 불어넣었지만, 현실은 곧 규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전쟁의 흔적이 아직 골목마다 남아 있던 시절, 먹고사는 일은 여전히 하루하루의 문제였다. 아이를 안고 서울로 올라간다는 것은 규에게 선택지가 아니었다. 1960년, 규는 큰딸을 시골에 남겨두고 남편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두 살 남짓한 아이를 떼어놓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품에 아이를 맡기고 돌아서는 길, 규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울지 않았고, 그 침묵이 규의 가슴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서울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다. 단칸방은 여전히 단칸방이었고, 방 하나에 밥 냄새와 땀 냄새, 희망과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규는 새벽이면 가장 먼저 일어났다. 밥을 짓고, 남편과 시동생들의 하루를 준비했다. 넷째 시동생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남편은 여기저기 백을 써서 그를 기쁜소리사라는 곳에 전기 기술자로 취직시켰다. 낮에는 현장에서 선을 잇고 기계를 만지며 기술을 익혔고, 밤이면 손에 밴 기름 냄새를 씻어내며 내일을 계산했다. 기술만 손에 쥐면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를 하루하루 버티게 했다. 막내, 다섯째 시동생은 전혀 다른 꿈을 품고 있었다. 그는 법관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고시공부부라 불리던 판잣집 같은 하숙방에서, 책과 연필이 그의 전부였다. 돈은 벌지 못했고, 결과도 기약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이미 다른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여겼다. 두 사람의 선택은 달랐지만, 그 부담은 고스란히 규의 몫이었다. 기술을 배우는 넷째의 밥과 빨래, 공부만 하는 막내의 생활비까지—모두 단칸방 안에서 해결해야 할 현실이었다. 그녀에게 서울은 꿈의 도시가 아니었다. 서울은 견뎌야 할 장소였고, 버텨야 할 시간이었으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짊어진 책임 그 자체였다. 1961년 5월 16일, 군사 혁명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거리에서 수군거렸다. 총과 군복이 다시 등장했지만, 이번에는 전쟁이 아니라 ‘질서’와 ‘재건’이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라디오에서는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말이 반복되었고, 신문에는 ‘근대화’와 ‘경제 개발’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실렸다. 규는 그 말들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사람들의 얼굴 어딘가에는 아주 미미하지만 분명한 변화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오늘보다 내일이 아주 조금은 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였다. 말로 하지 않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만 조심스럽게 숨겨 둔 기대. 1962년, 둘째딸이 태어났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남의 집에 시집와 딸만 둘이라는 사실은 말로 하지 않아도 집안 전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규는 알았다. 이 아이 역시 곁에 두기 어렵다는 것을. 결국 둘째딸도 시골로 보내졌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품으로. 아이를 안고 떠나는 날, 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울음은 안으로 삼켰고, 미안함은 숨처럼 들이마셨다. 서울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선택지는,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국가에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규의 하루는 여전히 밥을 걱정하고, 방세를 계산하며, 기술자가 되려는 시동생과 법관을 꿈꾸는 시동생의 앞날을 동시에 떠안는 일이었다. 국가의 구호와 개인의 삶 사이에는 언제나 긴 간격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버텼다. 전쟁도, 가난도, 남편의 침묵도, 장남 집안의 무언의 압박도—모두를 견디는 일이 곧 그녀의 몫이었다. 그렇게 규의 서울 생활은 이어졌다. 희망이라는 말이 아직은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웠던 시절, 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시대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일본집은 돈이 필요했다. 그 사실은 숨길 것도, 꾸밀 것도 없었다. 형제자매가 열 명에 달하는 집에서, 장남이 대학을 나왔다는 것은 자랑이었지만 동시에 부담이었다. 공부를 시킨 만큼, 집안은 더 가난해졌고, 장남이 벌어오기 전까지는 그 공백을 메울 방법이 없었다. 반면, 규의 집은 여전히 자산이 있었다. 산과 밭을 반이나 처분했어도, 남아 있는 땅과 곡식, 집안의 기반은 흔들리지 않았다. 먹고사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고, 무엇보다 딸만 다섯인 집안이 감당해야 할 미래를 정리할 여지는 충분했다. 그래서 이 혼사는 누군가의 바람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가 정확히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규의 어머니는 딸을 똑똑한 집안에 보내고 싶어 했다. 부자가 아니라도 괜찮았다. 가난해도, 머리가 있는 집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했다. 딸이 들어갈 집이 이 집처럼 딸만 낳았다고 주눅 들지 않아도 되는 집, 말보다 판단이 앞서는 집,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집이어야 했다. 일본집 장남은 그 조건에 맞아떨어졌다. 대학을 나왔고, 말이 조리 있었으며, 사람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았다. “배운 사람은 다르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 속에는 기대와 계산이 함께 들어 있었다. 혼사는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처음 이름이 오르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이 오갔고, 날짜가 오갔다. 아직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미 절차가 앞서 나가고 있었다. 규는 그 흐름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누가 물어보면 고개를 끄덕였고, 누가 묻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집에서 딸의 의견은 반대가 있을 때만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본집 쪽에서는 더 조급했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혼은 단순한 혼인이 아니라, 집안을 다시 세울 기회였다. 규의 집안이 가진 자산과 신뢰는 그 집에게는 곧 숨통이었다. 장남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부모는 숨기지 않았다. “형편이 어려워서 그렇지, 아이만 잘 키우면 달라질 겁니다.” 그 말은 부탁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약속에 가까웠다.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난은 견디면 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무능과 무지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공부한 사람은 다르다”는 말은 어머니 스스로를 설득하는 주문이기도 했다. 규는 그 대화를 곁에서 들으며 깨달았다. 이 혼사에서 자신은 딸이 아니라 조건이라는 것을. 돈이 필요한 집과, 똑똑한 집에 딸을 보내고 싶은 어머니. 그 사이에서, 규의 이름은 너무 쉽게 오갔다. 첫 대면은 짧았다. 말수는 많지 않았고, 예의는 갖추어져 있었다. 그는 규를 똑바로 보았고, 고개를 숙였다. “부족하지만 잘하겠습니다.” 그 말은 진심처럼 들렸다. 그러나 규는 그 말이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규의 집안을 향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대화는 어른들 위주로 흘러갔다. 학업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장남으로서의 책임”. 규에게 직접 묻는 말은 거의 없었다. “일은 잘 한다지?” “집안일엔 익숙하겠네.” 그 질문들은 확인에 가까웠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규는 혼자 마당에 나와 서 있었다. 집은 조용했고, 결혼 이야기는 이미 집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스물둘의 규는 알았다. 이 결혼이 실패는 아닐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의 선택도 아니라는 것을. 이 결혼은 일본집에게는 재기의 발판이었고, 어머니에게는 딸을 보내는 가장 합리적인 수였다. 그리고 규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의 연장이었다. 일은 정말 빠르게 진행되었다. 날짜가 잡히고, 짐 이야기가 오가고, 규의 자리는 조금씩 집 안에서 비워지기 시작했다. 막내 여동생은 아직 규의 치마를 잡았고, 어머니는 더 말이 없어졌다. 어머니는 규에게 말했다. “사람은 자리만 바뀌는 거다.” 그 말은 위로도, 설명도 아니었다. 그저 이 집안의 방식이었다. 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에서 배운 것은 하나였다. 머뭇거리면, 인생은 남이 대신 결정한다. 그리고 지금, 그 결정은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규는 1935년생이었다. 그리고 스물둘이 되었을 무렵, 더 이상 “아직 어리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그 시절, 여자가 스무 살을 넘긴다는 것은 곧 혼사가 오갈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고, 스물둘은 이미 한 박자 늦은 나이에 가까웠다. 집안에 딸만 다섯. 그 사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거워졌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말의 방향은 늘 같았다. “이제 큰딸은 갔고…” “그 다음이 규지?” “집안이야 말할 것도 없고.” 혼사는 규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집안의 체면, 자산, 그리고 딸만 다섯이라는 불안을 정리하는 문제였다. 그 무렵부터, 동네에 한 집안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집을 ‘일본집’이라고 불렀다. 일본집은 말 그대로, 일본에서 피난을 나와 정착한 집안이었다. 해방 직후, 전쟁을 거치며 모든 것을 일본에 두고 나와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집도, 땅도, 재산도 남겨둔 채 빈손으로 돌아온 집. 그 집에는 자식이 열 명이나 있었다. 형제자매가 줄을 지어 앉아 밥을 먹는 집. 사람들은 그 집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자식복은 있다.” “사람은 많은데, 가진 건 없다.” 일본집은 명백히 가난한 집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 점이 있었다. 그 집의 장남이었다. 장남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었다. 그 시절, 산골 마을에서 대학이라는 말은 거의 전설에 가까웠다. 책을 읽는 사람, 글로 세상을 배운 사람, 머리로 먹고살 수 있을지 모르는 사람. “일본집 장남이 대학 나왔다더라.” “공부는 참 잘했다던데.” “그래도 집안이 너무 약해.” 사람들의 평은 늘 반반으로 갈렸다. 그러나 누군가 이런 말을 꺼내는 순간,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그럼 규네 집하고 잘 맞지 않나?” 그 말이 나오자, 모든 조각이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규의 집은 부자였다. 비록 산과 밭을 반이나 팔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자산은 많았다. 집안은 흔들렸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일본집은 가난했지만, 장남은 학력이 있었고, 무엇보다 아들이 있었다. 이 혼사는 자연스럽게 정략결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규에게는 재산과 집안이 있었고, 그 집에는 이름을 이을 남자가 있었다.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규는 그 침묵이 오래 준비된 것임을 느꼈다. 어머니는 이미 계산을 끝낸 얼굴이었다. “일본집이라 해도, 사람은 괜찮다더라.” “아들 있는 집이다.” 그 말 속에는 딸을 걱정하는 마음과, 딸을 집안의 해법으로 쓰려는 결심이 함께 섞여 있었다. 아버지는 그 혼사 이야기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있을 때도, 없을 때도 결정은 늘 집 밖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규는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이 하나의 조건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자집 딸. 딸만 있는 집의 둘째. 스물둘. 일을 잘하고, 말수가 적고, 집을 떠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상대는 가난하지만 학력 있는 장남. 자식 많은 집의 기둥. 일본에서 돌아온 집안의 이름. 이 혼사는 사랑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완전히 낯설지도 않았다. 이 집안에서 살아온 규에게, 삶은 늘 이렇게 필요에 의해 결정되어 왔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규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 집은… 많이 가난하대요?” 어머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가난은 견디면 된다.” “하지만 없는 건, 채울 수 있어도 아들이 없는 건, 채울 수 없다.” 그 말은 규의 혼사에 대한 설명이었고, 어머니 자신의 인생에 대한 판결 같기도 했다. 결국 혼사는 오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말이 오갔다. 규는 그 대화의 중심에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목소리는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 이 결혼은 규를 위해서라기보다, 집안과 집안을 잇기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스물둘의 규는 알고 있었다. 이 결혼이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부자였기 때문이다. 대신 이 결혼은 자신을 한 집안의 답으로 만들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답의 대가는, 이제 곧 규 자신의 삶이 될 터였다.
규가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사람들은 슬슬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제 혼사 얘기 나올 때 됐지.” 그 말은 걱정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점검에 가까웠다. 나이가 찼는지, 집안이 괜찮은지, 그리고 무엇보다 아들이 없는 집인지를 확인하는 말이었다. 그 무렵, 집안에 다섯째 여동생이 태어났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태어난 아이였고, 이번에도 딸이었다. 집안에는 딸만 다섯이 되었다. 부잣집이었다. 여전히 논과 밭은 남아 있었고, 굶을 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이 시대에서 딸만 다섯인 부잣집은 축복이 아니라 흠에 가까웠다. 마을 사람들은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재산은 있잖아.” “사위 잘 들이면 되지.” “아들이 없어서 그렇지, 살림은 탄탄해.” 그 말들은 모두 같은 뜻이었다. 아들이 없다는 사실은 어떤 말로도 가려지지 않는 결함이라는 뜻. 규는 그 시선을 몸으로 느꼈다. 장에 나가면 말끝이 달라졌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눈길이 집 안쪽을 훑고 갔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더 조용해졌다. 이미 거칠어졌던 말투는 여전했지만,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면 어머니의 태도는 미묘하게 달라졌다. 어머니는 아버지 앞에서 늘 한 발 물러서 있었다. 그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체면의 문제였다. 이 집안에는 아들이 없었다. 그 사실은 어머니의 책임처럼 취급되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규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 앞에서 늘 주눅 들어 있었던 이유를. 딸만 다섯이라는 현실은 아버지의 부재조차 어머니의 잘못처럼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집에 들렀을 때, 어머니는 더 말수가 줄었다. 결정도, 판단도, 그 앞에서는 한 박자 늦어졌다. “당신 생각은 어떠세요.” 그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어머니는 늘 잠시 멈췄다. 규는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이 집을 실제로 지키고 있는 사람은 어머니였고, 아이들을 키운 것도, 자산을 줄이며 버텨낸 것도 어머니였다. 그런데도 아들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어머니는 늘 부족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스무 살의 규에게 혼사 이야기도 서서히 닿기 시작했다. 대놓고 오지는 않았다. 먼저 언니를 보낸 집이라는 점, 딸만 있는 집이라는 점이 함께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너는 맏며느리감은 아니다.” “집안이 좀 세다.” “어머니가 강하다고 들었다.” 그 말들은 전부 규가 아닌, 이 집안 전체를 평가하는 말이었다. 규는 그제야 깨달았다. 혼사라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집안의 구조를 검열하는 일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더 많은 일을 맡겼고, 더 단단해지기를 바랐다. “사람 말에 귀 기울이지 마라.” 그러나 그 말과 달리, 어머니 자신은 세상의 말을 온몸으로 듣고 있었다. 딸만 다섯이라는 사실, 아들이 없는 집이라는 시선, 그 모든 것이 어머니를 조금씩 눌러왔다. 그 압력은 화로 나오기도 했고, 침묵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어느 날 밤, 규는 다섯째 여동생을 안고 마당에 섰다. 아이의 얼굴은 아직 세상을 몰랐고, 죄도, 부족함도 없었다. 그러나 규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자신과 같은 시선을, 같은 무게를 언젠가는 받게 되리라는 것을. 스무 살의 규는 그날 처음으로 분명히 느꼈다. 이 집안에서 딸로 태어났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증명해야 할 숙제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숙제를 가장 오래, 가장 묵묵히 짊어지고 있는 사람은 어머니라는 것을.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규는 더 이상 어머니를 단순히 거친 사람으로만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이 나라와 이 집안의 시선 아래에서 오래도록 버티고 있었을 뿐이었다.
혼사는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지만, 규의 마음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학업의 차이였다. 일본집 장남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었다. 신문을 읽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했고, 말끝마다 근거가 있었다. 글로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 배운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규는 서당을 제대로 다닌 적도 없었고, 국민학교 문턱도 밟지 못했다. 한글을 더듬더듬 읽을 수는 있었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었다. 규는 평생을 집안일을 하는 딸로 자라왔다. 밥을 짓고, 아이를 업고, 밭을 일구고, 사람의 기분을 읽는 법은 누구보다 빨리 배웠다. 그러나 글 앞에 서면, 늘 자신이 작아졌다. 그 사실이 혼사가 구체화될수록 더 또렷해졌다. 그와 마주 앉아 있을 때, 규는 말이 줄어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물었다. “요즘엔 신문을 뭐로 보세요?” 규는 그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사람들이 말해주는 걸 듣습니다.” 그 말이 끝났을 때, 공기 속에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지만, 규는 느꼈다. 이미 차이가 드러났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도, 이 집안에서 배움의 씨앗은 넘칠 만큼 있었다. 아버지는 한학자였다. 유학을 배웠고, 주역을 섭렵한 사람이었다. 글을 읽고, 뜻을 풀고, 세상의 이치를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머니 또한 똑똑한 여인이었다. 숫자에 밝았고, 판단이 빠르며, 사람의 말 뒤를 읽을 줄 알았다. 집안을 굴린 것은 어머니의 머리였다. 그러나 그 배움은 딸에게 내려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글은 아버지의 세계에만 있었고, 어머니의 판단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만 전해졌다. 규는 글 대신 일을 배웠고, 책 대신 책임을 배웠다. 그래서 규는 배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배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을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 사실이 지금에서야 가장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규는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머니… 제가 너무 부족한 건 아닐까요.” 그 말은 혼사를 향한 질문이었고, 자기 자신을 향한 고백이었다. 어머니는 잠시 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뜻밖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배움이 없다고 사람이 모자라는 건 아니다.” 어머니의 말은 단단했다. “글은 배워도 되지만, 사람 사는 건 글로만 되는 게 아니다.” 그 말은 위로처럼 들렸지만, 규는 그 안에 또 다른 계산이 있다는 것도 느꼈다. 배움은 나중에 채울 수 있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혼사를 성사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규는 처음으로 그 계산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대학을 나온 사람의 아내로, 신문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자신이 어떤 자리에 서게 될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돈보다, 집안보다 훨씬 더 깊은 골처럼 느껴졌다. 그날 이후, 규는 혼사를 망설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일은 잠시 멈춘 듯 보였지만, 실은 규의 마음이 처음으로 제동을 건 순간이었다. 규는 알았다. 이 결혼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더 작게 만들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을. 스물둘의 규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집안의 딸로서가 아니라, 아내가 되기 전에, 사람으로서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있다는 것을. 그 질문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일본집의 가난은, 규가 알던 가난과는 달랐다. 일이 많아서 가난한 집이 아니라, 아무리 일을 해도 돈이 생기지 않는 집이었다. 시골의 일본집은 늘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형제자매가 열 명, 특히 남동생들이 많아 일손은 부족할 틈이 없었다. 새벽이면 누군가는 소를 몰고 나갔고, 누군가는 밭으로 갔고, 누군가는 물을 길어왔다. 집안은 늘 소란스러웠다. 아이들 목소리, 밥 짓는 소리, 웃음소리까지 섞여 겉으로 보면 활기찬 집 같았다. 그러나 그 활기는 돈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시아버지는 소작농이었다.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해마다 정해진 몫을 바치고 나면 손에 남는 것은 늘 얼마 되지 않았다.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아무리 땀을 흘려도 그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규는 그 사실을 며느리가 되어 처음으로 실감했다. “열심히 하면 나아질 거야”라는 말이 이 집에서는 가장 쉽게 무너지는 말이었다. 시어머니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음악과 흥이 있는 사람이었다. 노래를 흥얼거렸고, 장단을 치며 일을 했고, 사람들 앞에 서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을 잔치가 있으면 늘 앞자리에 있었고, 소리가 나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인생은 흥이야.” 시어머니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규는 그 말이 이 집의 현실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도 곧 알게 되었다. 흥은 많았지만, 살림은 늘 규의 몫이었다. 할 일은 산더미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밥 짓는 것만 해도 솥이 몇 개인지 세어야 했고, 빨래는 하루를 꼬박 써도 끝나지 않았다. 아이들이 많아 먹는 양은 많았고, 남은 것은 없었다. 규는 하루 종일 움직였다.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고,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손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남동생들은 말을 잘 들었고, 시키면 움직였다. 그래서 규는 혼자 모든 일을 떠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손이 많다는 것은 일이 더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람이 많으니 밥도 많아야 했고, 문제도 많아야 했고, 조율해야 할 관계도 많았다. 그리고 그 조율의 중심에는 늘 장남 며느리인 규가 있었다. 그즈음, 규는 첫딸을 낳았다. 1958년이었다.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규는 기쁘면서도 이상한 두려움을 느꼈다. 이 집에서 또 한 명의 딸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무게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 집은 이미 아이의 성별로 기대를 걸 여유조차 없었다. 아이는 그저 하나 더 먹여야 할 입이었고, 하나 더 품어야 할 존재였다. 그 무렵, 남편은 서울 공무원으로 취직이 되었다. 사람들은 “잘됐다”고 말했다. 시골에서 서울로, 농사에서 월급으로.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 집안에서 처음으로 고정된 돈이 들어올 가능성이 생긴 것이었다. 남편은 서울로 올라갔다. 먼저 자리를 잡아야 했다. 그러나 규는 함께 가지 못했다. “부모님 좀 모셔야지.” “아이도 아직 어리고.” 그 말은 부탁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당연한 순서였다. 규는 시골에 남았다. 아이를 안고,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를 모시며. 서울은 남편의 자리였고, 시골은 규의 자리였다. 낮에는 밭과 집을 오갔고, 밤에는 아이를 재웠다. 편지는 가끔 왔고, 돈은 더 가끔 왔다. 규는 그 돈을 조심스럽게 썼다. 아껴야 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아이를 재우고 난 뒤 규는 문득 생각했다. 자기 집에서는 부잣집 딸이었고, 여기에서는 가난한 집의 맏며느리였다. 그 사이에서 자신은 계속 일하는 사람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울 시간도 없었고, 울어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이미 너무 많이 배웠기 때문이다. 규는 다시 다음 날을 준비했다. 이 집의 가난은 슬픔이 아니라 구조였고, 그 구조 속에서 자신은 빠져나갈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이제 막 규의 몸에 새겨지고 있었다.
혼사는 결국 성사되었다. 사람들은 “잘 되었다”고 말했고, “서로에게 필요한 인연”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말들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규의 집에서 돈을 많이 주는 조건이었다. 일본집은 가난했고, 열 명의 자식을 둔 집은 늘 숨이 찼다. 장남이 대학을 나왔다 해도, 그 학력은 당장 밥을 벌어다 주지 못했다. 그래서 결혼은 사람과 사람의 결합이 아니라, 집과 집 사이의 이전(移轉)에 가까웠다. 규의 집은 돈을 냈고, 일본집은 장남의 자리를 내주었다. 어머니는 그 결정을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딸을 똑똑한 집안에 보내겠다는 생각, 그리고 딸만 다섯인 집안의 짐을 하나 내려놓아야 한다는 현실이 그 선택을 재촉했다. “사람은 머리가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장남을 향한 평가였고, 규에게는 설득이자 명령이었다. 규는 스물하나에 시집을 갔다. 아직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잘 모르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 나이였다. 그러나 시집살이는 그런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집에는 형제자매가 열 명이나 있었다. 규는 장남 며느리로 들어갔다. 그 말은 곧, 그 집의 모든 일이 이제부터는 규의 일이라는 뜻이었다. 아침밥을 짓는 일, 아이들을 깨우는 일, 밭과 집안일의 순서를 정하는 일, 어른들의 기분을 살피는 일까지. 시집에는 규보다 나이가 많은 시누이도 있었고, 아직 어린 동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관계 위에 “장남 며느리”라는 이름이 먼저 씌워졌다. “네가 맏며느리니까.” “네가 제일 먼저 들어왔잖아.” “이 집 일은 네가 알아서 해야지.” 규는 그 말들이 부탁이 아니라 배치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돈이 오간 혼사라는 사실은 규의 자리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었다. 일본집 사람들은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이 며느리는 이 집을 살리기 위해 들어온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규에게 기대되는 것은 사랑도, 이해도 아니었다. 감당이었다. 장남은 말이 적었다. 그는 자신의 결혼이 어떤 조건 위에서 이루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조심했고, 더 침묵했다. 그 침묵은 규를 보호하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각자의 짐을 각자 지고 가는 방식이었다. 규는 곧 깨달았다. 이 집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배움의 차이를 메우는 것도, 사랑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저 무너지지 않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스물하나의 규에게 이 결혼은 끝이 아니라 두 번째 시작이었다. 첫 번째는 딸로서의 삶이었다면, 두 번째는 며느리로서의 삶이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삶은 훨씬 더 많은 사람을 포함하고 있었다. 열 명의 형제자매, 가난한 집안의 살림, 그리고 장남이라는 이름의 무게. 규는 더 이상 자기 집의 딸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 채였다. 그날 밤, 규는 낯선 집의 부엌에 서서 솥에 물을 올렸다. 불은 빨리 붙었고, 할 일은 끝이 없었다. 그 순간, 규는 본능처럼 느꼈다. 이것이 제2라운드라는 것을. 전쟁이 끝난 뒤의 삶이 첫 번째였다면, 이 결혼은 두 번째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산으로 숨을 곳도, 집으로 돌아갈 길도 없었다. 스물하나의 규는 다시 한 번 자기 자리를 배치당하고 있었다.
어느덧 언니의 혼사가 정해졌다. 집안에서는 오래된 일처럼 받아들여졌지만, 규에게는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언니는 늘 집 안의 바깥을 맡아오던 사람이었고, 규는 그 뒤를 받쳐왔다. 그런 언니가 집을 떠난다는 것은, 집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어진다는 뜻이었다. 상대는 평범한 집안의 남자였다. 마을 사람들은 “성실하다”고 했고, “큰 흠은 없다”고 말했다. 그 말들은 칭찬처럼 들렸지만, 규는 그 속에 다른 뜻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평범하다는 말은, 가난하다는 말이었다. 논도 많지 않았고, 밭도 넉넉하지 않았다. 집안에 남아 있는 자산이라곤 손으로 일해 벌어야 하는 하루하루뿐이었다. 언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결혼을 택했다. 규는 그 선택이 도망인지, 용기인지를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결혼 준비는 조용히 진행되었다. 부잣집이었지만, 어머니는 크게 치르지 않으려 했다. “쓸데없이 티 낼 필요 없다.” 어머니의 말투는 예전보다 더 날이 서 있었다. 모든 결정은 빠르고 단호했다. 여지를 주지 않았고,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규는 어머니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은 늘 일을 더 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혼식 날이 다가오자,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아버지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머니는 입을 다물었고, 언니는 표정을 숨겼다. 규만이 그 공백을 또렷하게 느꼈다. 결혼식 날, 아버지의 자리는 끝내 비어 있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지만, 오래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이 집안에서는 부재가 설명이 필요 없는 상태가 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언니는 평범한 옷을 입고 식장에 섰다. 화려하지 않았고,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러나 규는 언니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 손은 평생 집을 위해 움직여온 손이었다. 이제는 다른 집의 일이 될 손. 언니는 규를 보며 웃었다. “너는 남아야지.”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규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남는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정해진 역할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언니는 떠났다. 짐은 많지 않았다. 평범한 집으로 가는 길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니가 떠난 뒤, 집안은 더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은 평온이 아니라, 압축된 긴장에 가까웠다. 어머니는 더 거칠어졌다. 말은 줄었고, 눈빛은 더 날카로워졌다. 규는 어머니의 기분을 살피는 법을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예측이 더 어려워졌다. “그건 왜 아직 안 했니.” “그렇게 하면 손해다.” “쓸데없는 감정 쓰지 마라.” 어머니의 말은 늘 옳았고, 늘 정확했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틀리지 않기에, 반박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규의 하루는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 일을 하고, 어머니의 말에 맞추어 움직이고, 동생들을 챙겼다. 막내는 자라나고 있었고, 여동생은 점점 규를 닮아갔다. 가끔 규는 생각했다. 언니는 왜 평범한 집으로 갔을까. 부유함을 버리고, 가난을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평범은 가난이었지만, 가난에는 아버지의 부재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생각이 규를 놀라게 했다. 그것은 언니를 이해하게 했고, 동시에 자신을 더 단단히 집 안에 묶어두었다. 어느 날 밤, 규는 어머니와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막내가 잠든 뒤였다. “언니는 잘 살까.” 규의 질문에 어머니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살아야지.” 그 말에는 걱정도, 애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현실을 인정하는 어조였다. 규는 더 묻지 않았다. 이 집에서 감정은 말로 꺼내는 순간, 약점이 되곤 했기 때문이다. 열아홉이 되어가는 규는 이제 안다. 이 집에서는 떠나는 사람이 한 명 생길 때마다, 남는 사람의 몫은 그만큼 늘어난다는 것을. 언니는 평범을 선택했고, 규는 견딤을 선택하지 않은 채, 견디고 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집에 없었고, 어머니는 더 강해졌으며, 규는 그 사이에서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 그렇게, 규의 일상은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다시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분명히 돈이 필요했다.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떠날 때마다 주머니가 가벼워졌고, 돌아올 때마다 표정이 더 흐려졌다. 방랑은 기질이었지만, 그 기질을 유지하는 데에도 돈은 필요했다. 처음에는 집안에서 감당할 수 있었다. 곡식을 풀고, 장부를 조정하고, 사람을 줄였다. 그러나 떠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빠져나가는 돈은 눈에 띄게 늘어났다. 결국 어머니는 결정을 내렸다. 집 뒤편에 있던 산, 그리고 마을 아래쪽에 있던 밭 몇 마지기. 가진 것의 반 정도를 처분해야 했다. 어머니는 그날 아침,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중개인이 다녀간 뒤에도 아무 말 없이 부엌에 앉아 쌀을 고르고 있었다. 규는 어머니의 손을 보았다. 쌀알보다 손이 먼저 거칠어져 있었다. 땅이 팔려 나가던 날, 마을 사람들은 조용히 수군거렸다. “그래도 아직 많잖아.” “반을 팔아도 저 집은 남는 게 있다.” 그 말들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집안에는 여전히 남은 땅이 있었고, 곡식도 있었고, 살림살이도 넉넉했다. 먹고 사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이들을 굶길 일도, 집을 잃을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규는 알았다. 땅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마음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그날 이후, 어머니는 달라졌다. 말이 짧아졌고, 목소리는 낮아졌지만 더 단단해졌다. 웃음은 거의 사라졌고, 대신 판단은 빨라졌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그건 안 된다.” “지금은 그럴 때 아니다.” 어머니의 말은 늘 칼처럼 정확했다. 부드럽게 설명하는 대신, 바로 결론으로 갔다. 감정을 섞지 않았고,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어머니는 집을 지키는 방식을 바꾸고 있었다. 규는 그 변화가 두려웠다. 하지만 이해도 했다. 아버지는 떠돌았고, 집안의 자산은 줄었고, 아이들은 늘어났다. 누군가는 더 단단해져야 했다. 그 사람이 어머니였다. 어느 날 밤, 규는 어머니가 홀로 장부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등잔불 아래에서 어머니는 한 줄 한 줄을 짚어가며 계산하고 있었다. 규는 그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남은 것과, 이미 사라진 것들. “어머니.” 규가 말을 걸자, 어머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땅을… 더 팔아야 하나요?” 그 질문에 어머니의 손이 멈췄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니.” 단호한 대답이었다. “이 이상은 안 판다.” 그 말에는 계산보다 의지가 더 많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이미 마음속에서 선을 그어두고 있었다. 더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선. 그날 이후, 어머니는 규에게 일을 더 많이 맡기기 시작했다. 밭일도, 집안일도, 사람 상대도. 규는 어머니가 자신을 믿어서라기보다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주 말했다. “집안은 마음 약한 사람이 지키는 게 아니다.” 그 말은 누구를 향한 말도 아니었지만, 규는 그 말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가 집에 들렀을 때, 집안 공기는 늘 긴장으로 가득했다. 아버지는 변한 어머니를 불편해했고, 어머니는 변하지 않는 아버지를 더 이상 이해하지 않았다. “이 집이 네가 떠돌라고 있는 줄 아느냐.” 어머니의 말은 날카로웠다.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늘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었다. 그날 밤, 규는 막내 여동생을 재우며 생각했다. 이 집에서 가장 많이 변한 사람은 어머니였고, 가장 적게 변한 사람은 아버지라는 것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신은 점점 어머니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열여덟의 규는 알았다. 부잣집이란, 자산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잃어도 버텨야 할 것이 많다는 뜻이라는 것을. 산과 밭을 반이나 팔아도, 집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얼굴에서, 예전의 부드러움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이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규가 열여덟이 되었을 무렵, 전쟁은 이미 끝난 이야기처럼 불렸다. 사람들은 휴전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며 다시 논으로 내려왔고, 무너진 담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규의 집에서는 전쟁이 끝났다는 말이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했다. 이 집은 전쟁 전에도 버텼고, 전쟁 중에도 버텼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대로 버텨야 하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규의 집은 원래 부잣집이었다. 대대로 내려온 논과 밭이 있었고, 소작을 맡기던 땅도 있었다. 창고에는 곡식이 쌓였고, 외양간에는 늘 소가 끊이지 않았다. 전쟁 중에 털리고 빼앗긴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뿌리째 흔들리지는 않았다. 이 집의 부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돈이 아니라,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부였다. 아버지는 장사를 한 적이 없었다. 돈을 벌러 나다닌 적도 없었다. 그는 그저 이 집에서 태어나, 이 집의 땅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집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는 다시 집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는 말도 했고, 바람을 쐬러 간다는 말도 했다. 어디로 가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정확히 말한 적은 없었다. 그의 방랑은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없어도 집은 굴러갔다. 아니, 오히려 아버지가 없기에 더 정확히 굴러가야 했다. 집에는 규의 언니와 여동생이 있었고, 그해에 여동생 하나가 더 태어났다. 막내는 전쟁이 끝난 뒤 태어난 아이였다. 사람들은 “역시 살림이 되니 아이를 더 낳는다”고 수군댔다. 그 말은 칭찬처럼 들리기도 했고, 시기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이가 태어나자, 집안의 일은 눈에 띄게 늘어났다. 부잣집이라 해서 손이 덜 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관리해야 할 것이 많았고, 결정해야 할 것이 많았다. 소작인들과 나눌 몫, 창고에서 풀어야 할 곡식의 양, 일꾼들에게 줄 품삯, 마을 행사에 내야 할 비용까지, 집안의 무게는 늘 숫자와 판단으로 나타났다. 언니는 바깥일을 더 맡았고, 어린 여동생은 아직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 그래서 규는 자연스럽게 안과 밖을 동시에 떠안은 딸이 되었다. 막내를 업고 장부를 넘겼고, 밭일을 하다 말고 마루에 앉아 어른들의 말을 들었다. 열여덟이라는 나이는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집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이 자리를 비울 수 없는가였다. 그 자리는 늘 규였다. 그해 가을, 마을에서 일이 하나 벌어졌다. 공동으로 쓰던 물길을 다시 정비하는 문제였다. 전쟁 중에 무너진 둑을 보수해야 했는데, 비용과 인력이 문제였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은 규의 집으로 향했다. “저 집이 제일 많이 내야지.” “땅도 많고, 여유도 있잖아.” 어른들은 회관에서 회의를 열었고, 규의 집에도 사람이 찾아왔다. 엄마는 막내를 안고 있었고, 규가 대신 마루에 나왔다. “아버지는 안 계시지?” “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어른 하나가 말을 꺼냈다. “그럼 네가 집안 대표로 얘기해야겠다.” 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부자 집의 딸은, 아버지가 없을수록 더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물길 공사 비용을 더 내달라”는 요구였다. 규정 이상이었다. 명목은 ‘형편상’이었지만, 실상은 기대였다. 규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규정대로 내겠습니다.” 그 말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가진 집이 너무 계산적이네.” “예전엔 이렇지 않았잖아.” 규는 고개를 들었다. “예전에도 같았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계셨을 뿐입니다.” 그날 이후, 마을에서는 규를 두고 말이 오갔다. ‘부잣집 딸치고는 만만하지 않다’는 말과, ‘아버지 없는 집안에서 딸이 나선다’는 말이 함께 섞였다. 며칠 뒤, 밤중에 규의 집 창고 문이 열렸다. 곡식이 조금 사라졌다. 누가 가져갔는지는 모두 짐작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가진 집도 좀 새야 균형이 맞지.” 그 말은 농담처럼 던져졌지만, 규는 정확히 들었다. 부유함이란 보호가 아니라, 늘 시험대에 오르는 자리라는 것을. 그날 밤, 규는 막내 여동생을 업고 창고 앞에 섰다. 곡식은 줄었지만, 집은 여전히 서 있었다. 이 집은 돈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자리를 지키는 힘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규는 알았다. 아버지는 이 집의 이름을 물려받은 사람이었고, 자신은 이 집의 시간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열여덟의 규는 부잣집 딸이었다. 그러나 그 부는 특권이 아니라, 떠날 수 없게 만드는 무게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무게를 남겨둔 채 오늘도 집 밖 어딘가에 머물고 있었다.
6·25 전쟁은 규의 집안을 두 동강 냈다. 삼촌은 어느 날 낮, 사람들 틈에 섞여 끌려갔다. 북으로 납북되었다는 말만 남았고, 그 이후로 그의 이름은 집안에서 조용한 공백이 되었다.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묻는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기 때문이다. 낮이 되면 빨갱이들이 내려왔다. 그들은 군인 같기도 했고, 그냥 굶주린 사람들이기도 했다. 집안에 있던 곡식은 포대째 사라졌고, 닭은 목이 비틀려 사라졌다. 돼지는 끌려가다 비명을 질렀다. 남겨진 것은 비어 있는 마루와 냄새뿐이었다. 그때부터 규의 가족은 낮에는 산, 밤에는 집에서 살았다. 낮에 산으로 올라가는 일은 피난이 아니라 일과가 되었고, 밤에 집으로 내려오는 것은 귀가였다. 규는 어둠이 오면 안도했고, 해가 뜨면 긴장했다. 세상은 그렇게 뒤집혀 있었다. 강원도의 산골에서 전쟁은 도시처럼 총성이 연속으로 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더 잔인한 것은, 모두가 먹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념은 배고픔 앞에서 의미를 잃었고, 사람들은 편보다 감자를 택했다. 그런 와중에, 사건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밤, 집으로 내려오던 길에 규는 사람 그림자 하나를 보았다. 그림자는 마당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달빛에 비친 얼굴은 군인이 아니었다. 헐렁한 인민복 차림의 젊은 남자였다. 그는 손을 들고 있었다. 총도, 칼도 없었다. “애야… 물 좀.” 엄마는 순간 멈췄다. 아빠는 규를 뒤로 밀었다. 언니는 숨을 죽였다. 그 남자는 떨고 있었다. 적이 아니라, 굶주린 사람이었다. 아빠는 물을 주지 않으려 했다. “물 주면, 내일 다시 온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바가지에 물을 담았다. 규는 그때 처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과 가족을 지키는 일이 서로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물을 마시고, 바가지까지 핥듯이 비웠다. 그리고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오늘 낮에… 이 집 털자고 했습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곡식 없다는 거 압니다. 그래서 그냥 보고만 갔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 숲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규는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낮, 산에 숨어 있던 규의 가족은 멀리서 연기를 보았다. 마을 아래쪽 집 하나가 불타고 있었다. 그 집은 전날 물을 주지 않은 집이었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빠는 고개를 숙였다. 규는 그날 깨달았다. 전쟁에서는 옳은 선택보다, 살아남는 선택이 먼저 온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의 대가는, 반드시 다른 누군가가 치른다는 것. 1953년, 휴전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도 규의 집안은 기뻐하지 않았다. 삼촌은 돌아오지 않았고, 곡식은 없었으며, 산에서 내려오는 법만 몸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규의 마음속에서는 밤과 낮을 나누는 기준이 그때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후로도 오래도록 사람을 믿기 전에, 그 사람이 배가 고픈지부터 살피는 어른이 되었다.
규는 결국 혼자 서울로 올라갔다. 첫째 딸은 데리고 가지 못했다. 아이는 시골에 남겨두었다. 시어머니 곁, 익숙한 마루와 흙길, 조그만 시골 국민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바로 그곳에. 규는 아이를 데리고 올라갈 형편이 아니었다. 서울의 살림은 너무 비좁았고, 먹여야 할 입은 이미 충분히 많았다. “조금만 있다가 데리러 올게.” 그 말은 약속이었지만, 규 자신도 지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이를 남겨두고 떠나는 일은 규에게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집안에서 아이와 어미가 떨어지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필요가 먼저였기 때문이다. 서울로 올라간 것은 규 혼자만이 아니었다. 시동생 둘이 함께 올라왔다. 열 남매 중에서도 유독 눈빛이 다른 아이들이었다. 넷째 시동생과 막내 시동생. 두 사람 모두 가난에 주눅 들기보다는 성공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서울 가면 뭔가 있겠지.” “시골에선 안 돼.” 그 말은 근거 없었지만, 확신만큼은 분명했다. 남편은 그들을 막지 못했다. 장남으로서, 동생들의 가능성을 꺾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선택의 결과는 자연스럽게 규의 몫이 되었다. 서울의 살림은 이미 빠듯했다. 작은 방, 낮은 천장, 겨울이면 냉기가 그대로 스며드는 집. 거기에 사람이 더해졌다. 시동생 둘은 아침이면 각자 길을 나섰다. 일자리를 찾고, 공부할 곳을 기웃거렸다. 말은 컸고, 계획은 많았지만, 당장 가져오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규는 다시 여러 사람의 하루를 관리하게 되었다. 밥을 짓고, 쌀을 재고, 오늘은 누구에게 얼마를 쓰면 되는지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시동생들은 규를 ‘형수’라고 불렀다. 그 호칭 속에는 고마움도 있었고, 기대도 있었고, 당연함도 섞여 있었다. 규는 그 차이를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구분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규는 시골에 남겨둔 딸을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학교에서 돌아왔을 시간, 흙 묻은 신발을 벗고 마루에 앉아 있을 아이. 규는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다. 서울은 아이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곳이었고, 자신의 선택은 변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동생 둘은 달랐다. 넷째는 말수가 적었지만, 늘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막내는 사람을 잘 만났다. 웃음이 있었고, 기회가 보이면 먼저 손을 뻗었다. 두 사람 모두 이 서울을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올라설 곳으로 보고 있었다. 그 야심은 규에게는 부담이었다. 이 집에서 야심은 곧 먹여야 할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규는 혼자 부엌에 앉아 있었다. 솥은 비어 있었고, 내일 쓸 쌀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늘 남겨두는 사람이고, 늘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것. 딸은 시골에 남겼고, 시동생들은 서울로 받아들였다. 그 선택의 무게는 항상 같은 방향으로 쏠렸다. 그러나 규는 울지 않았다. 울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버티는 법을 이미 오래전에 배웠기 때문이다. 서울 생활은 꿈이 아니었다. 그저 다른 형태의 생존이었다. 그리고 규는 그 생존의 한가운데에 조용히 서 있었다.
셋째 딸 원이가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자라 집안일에 합류하면서, 집안의 하루는 겉보기엔 한결 순탄해졌다. 이제 어머니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고, 첫째 영과 둘째 규, 셋째 원이는 자연스럽게 역할이 나뉘었다.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니었지만, 말없이 손이 먼저 움직였고 몸이 먼저 알았다. 아침이면 어머니는 살림과 일의 순서를 짜고, 세 딸은 그 흐름에 맞춰 움직였다. 집안은 마치 잘 맞물린 기계처럼 돌아갔다. 그러나 규의 마음속에는 늘 꺼지지 않는 감정이 하나 있었다. 배우지 못했다는 것. 부모는 공부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주지 *못했다기보다* 주지 *않았다*. 그 시절, 이 집안에서 사람은 곧 일손이었고, 일손은 곧 자산이었다. 논과 밭이 넓을수록 더 많은 손이 필요했고, 손이 많을수록 집안은 안정되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아이는 집안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규는 그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은 따라주지 않았다. 밭에서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이유 없이 화가 치밀었고, 어디에도 말하지 못할 아쉬움이 가슴 한켠에 쌓였다. 하지만 그 감정을 오래 붙잡고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일은 끝이 없었다. 해가 뜨기 전 논으로 나가고, 해가 지면 밭에서 돌아왔다. 물을 대고, 김을 매고, 볏단을 나르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집안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말 한마디 나누기도 전에 잠에 빠져들었다. 초저녁의 잠은 깊었고, 꿈조차 꾸지 않았다. 몸이 먼저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가 하루를 밀어내며 흘러갔다. 1945년이 왔다. 해방이라는 말이 어른들 사이에서 오르내렸지만, 규에게 해방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 일본 국기가 내려가고, 낯선 말 대신 익숙한 말이 들리기 시작했지만, 논은 여전히 논이었고 밭은 여전히 밭이었다. 일은 줄지 않았고, 하루는 여전히 길었다. 1948년, 나라가 새로 생겼다는 소식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이 생겼지만, 규의 손에 쥔 것은 여전히 호미와 볏단이었다. 그 사이 집안은 더 커졌다. 넷째 여동생이 태어났고, 이어 다섯째 여동생이 태어났다. 아이 울음소리가 늘어날수록 규의 책임도 늘어갔다. 아기들을 업고 일을 해야 하는 날도 많았다. 그리고 마침내, 집안의 막내로 아들 **성규**가 태어났다.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아들이었고, 집안은 잠시 들뜬 듯 보였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환한 기색이 돌았고, 어머니도 말수가 조금 늘었다. 집안은 겉으로는 평온했다. 그러나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집안에 굳이 돈을 벌 필요가 없던 사람, 늘 마을 근처에서만 지내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수맥을 본다며, 묘자리를 봐준다며 집을 비우는 날이 잦아졌다. 처음에는 며칠, 다음에는 몇 주, 점점 더 길어졌다. 돌아올 때마다 그는 피곤해 보였고, 말수는 줄어들었다. 어머니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대신, 더 많은 일을 떠안았다. 규는 어렴풋이 느꼈다. 무언가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집안의 자산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곡식이 줄었고, 땅이 하나둘 정리되었다.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아이들 앞에서 드러내지 않았지만, 밤늦게 혼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규는 그 등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에게는 이미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어른의 걱정까지 짊어질 자리는 없었다. 그리고 1950년 6월. 모든 것이 멈췄다.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은 갑작스러웠다. 총성과 폭격이 먼 이야기처럼 들리던 시절은 순식간에 끝났다. 마을 전체가 술렁였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평온이 사라졌다. 그날 이후, 규의 세계는 다시 한 번 뒤집혔다. 집안의 문제는 더 이상 집안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 그 자체가 문제였다. 아직 규는 몰랐다. 앞으로 몇 년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시간보다 더 길고 더 무거운 시간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다시 한 번, 아이가 아닌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로 불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 밤, 규는 잠들지 못했다. 밖에서는 바람 소리와 함께,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집 안을 천천히 채워가고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규" 였다. 집안에서는 이름보다 먼저 불렸다. “규야.” 그 부름에는 늘 할 일이 따라붙었다. 첫째 언니 **영**과 규는 그 집안의 가장 확실한 노동력이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빠질 수 있는 일은 없었고, 딸이라는 이유로 제외되는 일도 없었다. 두 아이는 집안의 하루를 움직이는 손과 발이었다. 규의 어머니는 마을에서도 소문난 사람이었다. 머리가 빠르고 판단이 정확했으며, 한 번 정한 일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말 한마디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똑 부러진다”고 했고, 그 말에는 존경과 두려움이 함께 섞여 있었다. 집안 살림과 농사일, 사람 쓰는 일까지 모두 그녀의 손에서 정리되었다. 지주 집안의 안주인이었지만, 그녀는 부유함에 기대어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오히려 풍족함이 흐트러짐으로 이어질까 경계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전혀 다른 결의 사람이었다. 한학을 깊이 공부했고, 주역을 특히 좋아했다. 농사일에 직접 나서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아버지를 찾았다. 강릉 일대의 수맥과 묘자리를 보는 것이 그의 오랜 취미이자 재능이었고, 그는 그것을 생업으로 삼지 않았다. 집안이 이미 충분한 자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곡식 창고는 늘 가득 찼고, 논과 밭은 해마다 변함없이 수확을 안겨주었다. 돈을 벌기 위해 서두를 이유가 없는 집안이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는 훗날 많은 이야기로 덧칠되었지만, 규의 어린 기억 속에서 일본인들은 반드시 잔혹한 존재로만 남아 있지는 않았다. 마을에는 일본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한국인들과 섞여 살았다. 물론 보이지 않는 차별과 권력의 기울기는 존재했지만, 규의 집안에서 곡식을 빼앗기거나 자산을 몰수당하는 일은 없었다. 일본인 관리가 집에 들락거린 적도 있었으나, 그것은 공포라기보다 불편함에 가까웠다. 아이의 눈에는 그들이 그저 낯선 말과 옷을 입은 사람들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는 무엇보다 **손이 많이 필요한 시대**였다. 기계가 없었다. 논을 갈고, 모를 심고, 벼를 베는 모든 일은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밭일도 마찬가지였다. 해가 뜨기 전부터 일을 시작해 해가 넘어가서야 끝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노동은 선택이 아니라 생계였고, 생계는 가족 모두의 몫이었다. 규의 어머니는 이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첫째 딸 영, 둘째 규, 그리고 셋째 딸까지 가리지 않고 일을 시켰다. 밭일과 벼농사, 집안일은 자연스럽게 딸들의 몫이 되었다. 아들에 대한 기대는 따로 있었지만, 그 기대가 자라기 전까지 집안을 지탱하는 것은 딸들의 손이었다. 규는 언제나 언니의 등을 보며 일했다. 영이 논두렁을 걸으면 규도 그 뒤를 따랐고, 영이 볏단을 옮기면 규도 같은 무게를 들었다. 어머니는 일을 시키면서도 설명하지 않았다. “왜 해야 하느냐”는 질문은 허락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기에 하는 것이었고,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규는 그 침묵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일의 순서, 계절의 흐름, 어른들의 얼굴빛을 읽는 법,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하는 것들. 아이는 그렇게 조금씩 어린아이의 시간을 잃어갔다. 해 질 무렵, 온몸에 흙과 땀을 묻힌 채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종종 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규는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곤 했다. 손은 거칠어지고 발바닥은 굳은살로 단단해졌지만, 책 속 글자들은 여전히 그녀의 세계 밖에 있었다. 그 간극을 규는 말로 표현하지 못했다. 다만 마음 어딘가에, 설명할 수 없는 조용한 감정이 쌓여갔다. 그 시절 규에게 삶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연속이었다. 기쁨도, 슬픔도 분명하지 않은 채, 그저 하루가 지나면 다음 하루가 오는 식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규는 이미 어린 나이에 이 집안의 일부가 아니라, 집안을 움직이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은 훗날 그녀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성격이 되어,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58년생 속이니, 그가 훔친 70년의 시간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속이니는 한 가지를 명확히 인식했다. 이제 사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중학교까지는 감정과 관계만으로도 충분히 실험이 가능했지만, 고등학교는 다른 규칙으로 움직였다. 여기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돈은 사람보다 훨씬 정직한 도구였다. 그가 선택한 대상은 민재였다. 민재는 성적이 좋았고, 부모는 지역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사업가였다.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돈을 쉽게 쓰는 법을 배운 아이라는 점이었다. 속이니는 민재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대신 민재가 먼저 다가오게 만들었다. “너 아버지 회사, 요즘 잘 나간다며.”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존경도, 부러움도 아닌 가치 인정이라는 신호였다. 속이니는 아이디어를 냈다. 학급 신문, 학교 굿즈, 체육대회 티셔츠. 모두 수익이 될 수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난 돈엔 관심 없어. 기획만 재밌으면 돼.”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통제 구조였기 때문이다. 민재는 돈을 냈고, 속이니는 방향을 정했다. 역할은 자연스럽게 분리되었다. 돈을 낸 사람 결정을 내리는 사람 책임은 언제나 전자에게 돌아갔다. 문제가 생겼을 때도 속이니는 한 발 뒤에 있었다. 티셔츠 납기가 늦어졌고, 체육대회 날 일부 학생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담임이 불렀다. “이거 누가 주도했지?” 민재가 손을 들었다. 속이니는 그 옆에서 고개를 숙였다. “제가 말렸어요. 이건 리스크가 있다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항상 리스크를 설명만 했지, 막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민재는 꾸중을 들었고, 부모에게 혼이 났다. 돈은 회수되지 않았다. 속이니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명확한 공식을 완성했다. 돈을 쓰게 하되 결정을 하게 하지 말고 결과의 얼굴을 맡겨라 이 공식은 너무나 완벽했다. 도덕도, 법도, 감정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저 구조의 배치일 뿐이었다. 민재는 점점 지쳐갔다. 속이니에게 묻기 시작했다. “이거… 우리가 잘못한 거 아니야?” 속이니는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잘못은 감정의 문제야. 우린 구조를 만든 것뿐이야.” 그 말은 민재를 안심시키지 못했지만, 반박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몇 달 후, 속이니는 조용히 손을 뗐다. “이젠 재미없어.” 그가 빠지자 프로젝트는 곧 무너졌다. 돈의 흐름은 멈췄고, 책임은 남았다. 민재는 그 책임을 끝까지 짊어졌다. 속이니는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봤다. 연민은 없었다. 다만 확인이었다. 사람은 돈을 잃으면 흔들리지만,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그날 속이니는 일기장에 단 한 줄을 적었다. 돈은 손에 쥐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 문장은 아직 미완성이었지만, 이미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언젠가 그는 자신의 이름이 아닌 법인의 이름으로 돈을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법인은 살아남고, 사람은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고등학생 속이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왕이 되는 법이 아니라, 책임을 지지 않는 왕이 되는 법을.
중학교 2학년 봄, 반에는 ‘자율학습반’이라는 이름의 모임이 생겼다. 실은 자율도, 학습도 아니었다. 성적이 애매한 아이들을 모아 담임이 관리하려는 임시 장치였다. 속이니는 그 자리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다. 이유는 단순했다. 닫힌 공간은 관찰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속이니는 새로운 놀이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여섯 명. 그는 집단을 대상으로 실험했다. 첫 주에는 칭찬을 흘렸다. “우리 반에서 여기 애들만 제대로 생각하는 것 같아.” 말은 공중에 던졌지만, 각자 자기에게 향했다고 믿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아이들은 눈을 반짝였고,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둘째 주에는 비교였다. 속이니는 항상 없는 기준을 만들었다. “선생님이 그러시던데, 결국 남는 건 두 명 정도래.” 누가 남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 공백을 아이들 스스로 채우게 했다. 셋째 주, 균열은 스스로 커졌다. 누군가는 문제집을 숨겼고, 누군가는 틀린 답을 일부러 알려줬다. 누군가는 밤새 공부하다 울었다. 속이니는 그 모든 과정을 조용히 기록했다. 노트에 적지 않았다. 표정으로, 호흡으로, 말의 떨림으로 외웠다. 이 아이는 압박에 약하다. 저 아이는 인정에 굶주려 있다. 저 둘은 함께 두면 반드시 서로를 해친다. 그는 단 한 번도 직접 손을 대지 않았다. 유도만 했을 뿐이다. 결과는 아이들 몫이었다. 사건은 시험 전날 터졌다. 자율학습반 중 한 명이 교무실에서 울며 소리를 질렀다. “다 속은 거예요. 다 저 사람이—” 하지만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속이니는 그 시간, 복도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누군가 그를 불렀을 때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어?” 그 얼굴에는 진심으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표정이 있었다. 담임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들은 혼란스러워졌다. 기억은 흐려졌고, 책임은 분산됐다. 결국 자율학습반은 해체되었다. 남은 것은 성적이 떨어진 아이들,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된 관계, 그리고 아무 기록도 남지 않은 실패였다. 속이니는 그날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 “재미없네.” 죄책감은 없었다. 후회도 없었다. 다만 확신이 하나 생겼을 뿐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움직인다. 돈도, 신뢰도, 조직도— 적절한 불안과 기대만 있으면 스스로 무너진다. 그날 이후 속이니는 더 이상 사람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구조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작았고, 다음 실험은 더 큰 판에서 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거울 속의 아이는 웃고 있었다. 아직 왕관은 없었지만, 왕이 될 때 필요한 것은 이미 모두 갖춘 얼굴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속이니는 관계를 ‘사람’이 아닌 ‘배치’로 보았다. 교실은 감정이 오가는 공간이 아니라, 힘의 흐름이 설계되는 판이었다. 그는 웃었지만 기뻐하지 않았고, 위로했지만 공감하지 않았다. 필요한 감정만 정확히 흉내 냈을 뿐이다. 진수는 그 설계의 핵심이었다. 속이니는 늘 진수보다 한 발 앞에서 정보를 흘렸다.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그 말은 신뢰의 언어가 아니라 족쇄였다. 진수는 선택받았다고 믿었고, 그 믿음은 곧 복종으로 변했다. 속이니는 직접 명령하지 않았다. 대신 불안을 심고, 비교를 부추기고, 고마움을 가장한 우위를 쌓았다. 시험에서 진수가 실수하면 속이니는 조용히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넌 원래 이런 애잖아.” 그 말은 위로처럼 들렸지만, 정체성을 규정하는 칼날이었다. 반대로 자신이 앞설 때는 겸손을 연기했다. “운이 좋았어.” 그 겸손은 주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 속이니에게 죄책감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은 도구였고, 관계는 소모품이었다. 그는 타인의 감정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지만, 그 거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왕좌는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을 왕으로 대우하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
1970년 초, 대한민국은 '중학 입시'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이른바 일류 중학교에 진학하느냐 마느냐가 가문의 영광과 개인의 팔자를 결정짓던 시절이었다. 58년생 개띠들이 6학년이 되던 해, 교실은 공부하는 기계들의 수용소와 같았다. 속이니는 이 혼란을 기회로 삼았다. 그는 공부에 있어서도 순수한 탐구심보다는 '남을 이겨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과 '남의 성과를 가로채는 요령'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는 수업 시간에 집중하는 척하면서도, 쉬는 시간에는 선생님들의 성향을 파악해 예상 문제를 찍어내는 데 탁월했다. 결국 속이니는 명문 중학교 합격증을 거머쥐며 자신의 '영리함'을 증명했다. 한편, 부유한 환경 덕분에 당대 최고의 과외 선생들을 붙였던 진수 역시 같은 학교에 나란히 합격하며 둘의 인연은 중학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기만으로 설계된 '상전과 부하'의 관계] 중학교 입학 직전의 겨울방학, 속이니는 진수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을 시작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다져온 이간질과 가스라이팅은 이제 훨씬 정교해졌다.
1966년 봄, 서울의 한 사립 국민학교 2학년 2반 교실은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활기로 가득했다. 진수는 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아이였다. 아버지가 큰 사업가여서 늘 깨끗한 교복을 입고, 당시 귀하던 만화경이나 플라스틱 조립식 장난감을 서슴없이 친구들과 나누는 통 큰 아이였다. 자연히 진수 주변에는 늘 친구들이 북적였다. 이속이니는 달랐다. 군 간부인 아버지 덕에 가난하진 않았지만, 늘 진수 집안의 풍요로움과 비교되는 자신의 처지에 열등감을 느꼈다. 속이니의 아버지는 '군인 정신'과 '위계질서'를 강조하며 집에서도 권위적이었다. 속이니는 이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모방했다. 어느 날, 속이니는 진수에게 다가왔다. 진수가 가장 아끼는 단짝 친구인 영호를 겨냥했다. "진수야, 너 영호 조심해야 돼." 진수는 의아했다. "왜? 영호는 착한 애잖아." 속이니는 진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감정 한 조각 없는 얼굴로 조용히 속삭였다. 이것이 그의 교활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속이니는 영호가 진수의 아버지를 몰래 비웃는 것을 들었다고 거짓말했다. "며칠 전, 영호가 너희 아버지가 '졸부'라고 말하는 걸 내가 직접 들었어. 영호는 네가 가진 장난감 때문에 너랑 노는 거야. 쟤는 속으로 너를 무시해." 영호는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속이니는 영호에게는 "진수가 너희 집이 가난해서 더럽다고 하더라"는 식으로 정반대의 거짓말을 했다. 순수한 2학년 아이들은 교묘한 이간질에 속수무책이었다. 진수는 영호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영호는 진수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둘 사이의 간격은 점점 벌어졌다. 결국 진수와 영호는 멀어졌고, 진수 옆에는 영호의 빈자리를 차지한 속이니만 남게 되었다. 속이니는 진수의 다른 친구들에게도 똑같은 수법을 반복하며 하나둘씩 떼어놓았다. 진수의 친구들을 모두 고립시킨 속이니는 이제 자신이 무리의 중심이 되었다. 돈이 없어 진수처럼 장난감을 사줄 수는 없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군 지위를 이용해 허세를 부렸다. "우리 아버지는 별을 달 분이야. 너희 아버지들보다 훨씬 높은 분이라고. 내가 말하면 다 들어줘야 해." 그는 아버지의 권위를 자신의 힘인 양 거들먹거리며, 아이들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2학년 2반 교실은 더 이상 순수한 아이들의 놀이터가 아니었다. 이속이니라는 작은 '약탈자'의 기만적인 통치 아래 놓인 작은 왕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인류의 탐욕이 빚어낸 재앙과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 장르: SF, 생존 스릴러, 크리처물. 기획 의도: 시시각각 변하는 거대한 파도와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이라는 압도적인 자연 배경 속에서, 미지의 존재와 맞닥뜨린 인간 군상의 극한적인 공포와 드라마를 담아낸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속이니는 관계를 ‘사람’이 아닌 ‘배치’로 보았다. 교실은 감정이 오가는 공간이 아니라, 힘의 흐름이 설계되는 판이었다. 그는 웃었지만 기뻐하지 않았고, 위로했지만 공감하지 않았다. 필요한 감정만 정확히 흉내 냈을 뿐이다. 진수는 그 설계의 핵심이었다. 속이니는 늘 진수보다 한 발 앞에서 정보를 흘렸다.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그 말은 신뢰의 언어가 아니라 족쇄였다. 진수는 선택받았다고 믿었고, 그 믿음은 곧 복종으로 변했다. 속이니는 직접 명령하지 않았다. 대신 불안을 심고, 비교를 부추기고, 고마움을 가장한 우위를 쌓았다. 시험에서 진수가 실수하면 속이니는 조용히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넌 원래 이런 애잖아.” 그 말은 위로처럼 들렸지만, 정체성을 규정하는 칼날이었다. 반대로 자신이 앞설 때는 겸손을 연기했다. “운이 좋았어.” 그 겸손은 주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 속이니에게 죄책감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은 도구였고, 관계는 소모품이었다. 그는 타인의 감정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지만, 그 거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왕좌는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을 왕으로 대우하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한강의 기적을 일군 아버지 세대의 성공 신화 뒤, 1970년생 '끼인 세대'가 겪는 생존과 좌절,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
1965년생 성현의 기억 속 가장 오래된 서울은 흙먼지 날리는 골목과 아이들의 함성으로 가득합니다. 그가 다녔던 성북구(현 강북구)의 국민학교는 학생 수가 너무 많아 '2부제 수업'이 일상이었습니다. "성현아, 오전반이다! 빨리 뛰어!" 어머니의 목소리에 눈을 뜨면, 성현은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달렸습니다. 한 반에 무려 80명에서 100명에 육박하는 아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콩나물 시루' 같던 교실. 오전반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복도에서 기다리던 오후반 아이들이 밀물처럼 교실을 채우던 진풍경이 매일 반복되었습니다. 교실 안은 늘 삼엄한 검사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바로 '혼식 검사'였습니다. 정부의 절미 운동으로 흰쌀밥만 싸 오는 것은 '반칙'이던 시절, 성현은 도시락 뚜껑을 열기 전 늘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선생님이 교탁에서부터 도시락을 검사하며 다가오면, 보리알이 듬뿍 섞인 밥을 당당히 내보였습니다. 가끔 몰래 흰쌀밥을 밑에 깔고 위에만 보리를 얹어온 친구가 걸려 꾸중을 듣는 날이면, 교실 안은 묘한 긴장과 웃음이 교차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우면서도 활기찼던 행사는 단연 '쥐잡기 운동'이었습니다. "전국 쥐 잡는 날"이 선포되면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쥐 꼬리를 잘라 오라는 숙제를 내주기도 했습니다. "야, 저기 쥐 구멍이다!" 방과 후, 성현과 동네 친구들은 골목 어귀를 누비며 쥐를 쫓았습니다. 쥐를 잡았을 때의 그 징그러우면서도 짜릿한 성취감, 그리고 쥐 꼬리를 봉투에 담아 학교에 제출하며 뿌듯해하던 기억은 2025년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기이한 풍경이지만, 당시 아이들에겐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중요한 '과업'이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일구기 위해 매일 새벽 인력 시장으로, 공장으로 향하던 아버지들의 뒷모습을 보며 자란 성현. 비록 가난하고 비좁은 교실이었지만, 운동장에서 먼지를 풀풀 날리며 뛰어놀던 그 시절의 서울은 성현에게 '살아남는 법'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가르쳐준 인생의 첫 페이지였습니다.
1970년대 후반, 미아동 산동네 성현의 집안 분위기는 늘 묘한 대조를 이뤘습니다. 한 살 터울 동생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상 앞에 붙어 앉아 전교 석차를 다투는 수재였습니다. 반면, 성현은 가방을 방구석에 던져두기 무섭게 골목으로 튀어 나가는 '동네 대장'이었습니다. “성현아, 동생 반만이라도 좀 닮아봐라!” 어머니의 잔소리는 일상이었고, 성현 스스로도 공부에는 큰 흥미가 없었습니다. 교과서 속의 빼곡한 글자보다는 교실 창밖으로 지나가는 뭉게구름이나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의 움직임에 마음이 먼저 가 닿았습니다. 하지만 성현에겐 남들이 갖지 못한 두 가지 특별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붓'이었습니다. 수업 시간 내내 교과서 여백에 낙서를 하던 성현의 재능은 미술 시간만 되면 빛을 발했습니다. 사물을 꿰뚫어 보는 관찰력과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도화지를 채워나갔고, 어느 날 학교 대표로 나간 전국 어린이 사생대회에서 덜컥 '금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상장을 들고 온 날, 공부하라고 타박하던 아버지도 그날만큼은 성현의 어깨를 툭 치며 "허허, 요놈 봐라?" 하고 웃으셨습니다. 또 다른 재능은 '발'이었습니다. 체육 시간마다 성현의 순발력은 독보적이었습니다. 100미터를 쏜살같이 달리고, 자기 키만한 높이뛰기 바(bar)를 가볍게 넘는 그를 눈여겨본 체육 선생님의 권유로 성현은 학교 육상부에 발탁되었습니다. 방과 후, 노을이 지는 운동장에는 성현의 가쁜 숨소리가 가득했습니다. 전국체전 후보 선수로 선발되어 매일같이 단거리 질주와 높이뛰기 훈련을 반복했습니다.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릴 때가 정적인 몰입의 시간이었다면, 높이뛰기 바를 향해 달려가 허공을 날아오르는 순간은 세상의 모든 중력에서 해방되는 짜릿한 자유의 시간이었습니다. "공부해서 판검사 돼야지"라는 말이 최고의 미덕이던 시절, 성현은 동생처럼 책상 앞을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몸으로 세상을 느끼고, 자신의 손으로 세상을 그려내는 법을 일찍이 깨달았습니다.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가는 아버지 세대의 '성실함'과는 조금 다른, 자기만의 색깔과 리듬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서울의 운동장과 화폭 위에서 익혀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1980년대 초, 성현이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집안의 분위기는 한층 엄숙해졌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건국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 공무원이셨지만, 80년대 하급 관리의 월급은 '쥐꼬리'라 불릴 만큼 박봉이었습니다. 청렴을 미덕으로 아셨던 아버지는 낡은 서류 가방 하나로 오직 성실하게 가정을 지키셨지만, 늘어나는 자식들 뒷바라지에는 턱없이 부족한 살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래도 큰아들은 집안의 기둥이다. 성현이만큼은 아버지보다 더 번듯하게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이 있으셨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운동장을 누비던 성현의 재능은 어머니에게 그저 '한때의 풍류'일 뿐, 세상을 이기는 무기는 오직 '공부'라고 믿으셨습니다. 어머니는 부족한 생활비를 쪼개고, 남들 모르게 부업까지 해가며 성현의 과외비를 마련하셨습니다. 당시 전두환 정부의 '7.30 교육개혁'으로 과외가 금지되었던 시기였음에도, 어머니는 용하다는 대학생 과외 선생님을 수소문해 성현을 앉혀놓았습니다. "성현아, 너는 우리 집의 얼굴이다. 이 돈이 어떤 돈인지 너도 알지?" 좁은 방 안, 과외 선생님과 마주 앉은 성현의 뒤통수에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박히는 듯했습니다. 운동장에서 땀 흘릴 때보다, 캔버스에 붓질을 할 때보다 펜을 쥔 손은 더 무거웠습니다. 아버지의 낡은 양복 소매와 어머니의 거친 손등을 떠올리면, 영어 단어 하나 수학 공식 하나가 단순한 지식이 아닌 '가족의 생존'처럼 느껴졌습니다. 성현은 동생처럼 공부가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밤늦게 퇴근해 거실에서 조용히 신문을 읽으시는 법대 출신 공무원 아버지의 뒷모습과, 자신의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어머니의 희생을 보며 처음으로 '장남의 무게'를 실감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던 감수성과 높이뛰기를 하던 순발력은 잠시 접어두어야 했습니다. 대신 성현은 어머니의 소망대로 '성공이라는 높은 바'를 넘기 위해, 난생처음 자신과 맞지 않는 책상 앞에서의 고독한 질주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한강의 기적을 일군 아버지 세대가 자식에게 물려준 숙명이자, 1965년생 성현이 짊어져야 할 첫 번째 삶의 보따리였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며 세상은 갑자기 조금 넓어진 것처럼 보였다. 교복을 입고 처음 학교에 들어가던 날,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고 ‘이제는 좀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중학교 1학년 때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이어진 과외 덕분인지 영어와 수학 점수는 늘 상위권에 머물렀다. 시험지를 받아 들 때면 안도감이 먼저 들었고, 부모님의 얼굴에 잠깐 스치는 만족한 표정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학교생활도 겉으로 보기엔 순조로웠다. 친구를 사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웃고 떠드는 무리에 자연스럽게 섞였고, 쉬는 시간에는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공을 차거나 교실 뒤편에서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때의 나는 ‘문제없는 아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학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나는 여전히 철없는 아이에 불과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른들이 왜 그렇게 바쁘고 예민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곧 전부라고 생각했고, 점수 몇 개로 나 자신을 쉽게 판단했다. 친구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의 말에 쉽게 상처받고, 또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의 나는 ‘잘하고 있다’는 말 속에 숨어 있는 불안과 미숙함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오늘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고, 내일도 비슷할 것이라 믿었다. 아직은 세상이 나에게 큰 질문을 던지지 않았고, 나 역시 세상에 대해 묻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은 준비되지 않은 채 다음 단계로 밀려가던 시간이었다. 공부도, 친구도, 삶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던 때. 중학교 생활은 그렇게 겉보기엔 평온했지만, 속으로는 아직 자라지 못한 한 아이의 시간이 조용히 쌓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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